종종 어린아이를 보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여러 역할극을 자처해서 연극을 하듯 노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런 아이였다. 어릴 적부터 난 혼자 놀기의 고수였다. 중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시끌벅적하게 올리곤 했지만 주로 홀로만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친구들과 피시방을 가는 것도 좋지만, 독서실에서 공부하며 틀어놓던 ‘장근석의 영스트리트’ 라디오에 이따금 사연을 보내고 내 사연이 소개되는 걸 나름의 성취이자 작은 자랑으로 삼았다.
캐나다에 유학을 가면서 본격적인 이방인의 삶이 시작 되었다. 취미 부자인 나는 중학교 1학년부터 마술사가 되고 싶어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공짜 마술쇼를 보여주러 다녔고, 고등학교 땐 묘기 인라인에 빠져 남의 지붕에 올라가 롤러 블레이드를 타고 뛰어 내리는 스턴트를 하다 이빨을 깨먹기도 했다. 늘 남들과 다른 취미를 가지고 아웃사이더가 되길 자처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2학년 때까지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다녔는데, 또 외롭다고 온갖 소셜 이벤트는 참여해선 입다물고 있어서 한인사회에서 클롸드는 신비한 아이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나의 외톨이 성향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상하이에 살며 카페투어를 정리해 블로그에 올리던걸 계기로 한인들과 카페투어도 계획하고, 후엔 원데이 커피 클래스를 운영하며 꽤 많은 연대를 하게 되었지만 누구와도 깊게 지내진 않았다. 고로 잠시 스쳐가는 인연 같은 얕은 연대를 즐겼따. 난 그저 홀로 운동하고, 밥을 먹고, 카페를 가고, 일하기를 좋아했다. 그래선지 상하이 한인사회에서 “커피에 미친 클롸드는 게이다”라는 흉흉한(?) 소문까지 들어야 했다. 하지만 사실은 반대였다. SNS에 굳이 티를 내지 않았지 나는 누구보다 왕성한 연애를 해왔다는건 다들 꿈에도 몰랐으리라. 무리를 지어 다니는 한국인 특유의 민족성이 싫었고, 그래서 오히려 자유분방하게 홀로 다니며 새로운 무리에 잠시나마 끼었다가 사라지는게 좋았다.
홀로 있음을 즐기지만 파티에 가면 누구보다 외향적인 척 연기를 하며 누구와도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다만 정말 맘에 드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날 즐겁게 술잔을 건배하며 즐겁게 지낸 것으로 만족하고 깊은 사이로 발전하지 않았다. 다양한 이들과 얕은 연대를 즐기며 살아왔다. 늘 여행은 홀로 떠났다. 여자 친구나 친구가 있다고 한들 마다하지 않고 홀로 여행을 고집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인생의 모토였다.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낼 수 있을 때, 남자 또는 타인, 그리고 세상과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인생은 고독하고, 홀로 살다 가는 것. 타인은 나를 절대 이해할 수 없고, 나 역시 타인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타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오롯이 나와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자. 이것은 부모와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에게 받지도 말고 주지도 말자는게 나의 가족관이었다.
유례없던 코로나가 터지고 상하이에서의 7년간 외노자 삶을 급하게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유학 길에 오른 고등학교 1학년 이후로, 입대 시절 2년을 빼면 처음으로 한국에 정착하며 살게 되었다. 역병이 돌고 있음에도 상하이에서 시작했던 원데이 커피 클래스를 한국에서도 이어갔다. 때론 집에서, 때론 타인의 카페를 빌려서 클래스를 열었다. 그러다 불쑥 내 공간을 계약하게 되었다. 집 앞에 자주 가던 카페가 원주로 이전하게 되어, 그 공간이 다른 공간으로 바뀌는게 싫어 불쑥 계약하여 7평 남짓한 공간에 생애 첫 카페를 오픈 하게 된 것이지.
사실 카페를 열 생각은 추어도 없었다. 주변 카페 오너 친구들에게 얼마나 카페 일이 품에 비해 돈을 벌지 못하는 직업인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홀로 가게의 마케팅, 세일즈, 브랜딩, 고객 접대, 청소까지 도맡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쟁쟁한 카페가 가득한 서울에선 더더욱 말이지. 그럼에도 난 이 공간을 운영해보고 싶었다. 어차피 살다보면 한번은 카페를 운영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젊을 때 결혼하기 전에 해보자! 라는 취지였다. 단순 카페보단 커피 클래스를 진행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커뮤니티의 장이자 사랑방으로 운영하고픈 욕심이 있었다.
사실 카페는 1년만 운영하고 접을 예정이었다. 이유는 이미 입지가 그리 좋지 않았고, 애초에 N잡으로 오픈한 것이기에 하루 3시간 오픈으로는 수익이 보잘것없었다. 그럼에도 자아실현의 이유로 1년 6개월가량 운영하고 가게는 종료되었다.
독고다이였던 내가 변화를 한 것은 아마 이쯤이었던 것 같다. 가게를 개점하며 블로그나 유튜브로 소통했던 찐 이웃들을 실제로 마주하게 되었고, 커피클래스를 통해서 정말 다양한 직업과 출신지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함께” 하는 가치의 소중함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인생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가게에 사소한 메뉴판 구성을 하는 데에도 센스있는 친구 H에게 매일 시도 때도 없이 카톡 하며 그녀를 괴롭히기도 했다. 당시 사귀었던 D는 엔잡으로 바쁜 남자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물심양면으로 내 편의를 봐주어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옆에 있어 주었다. 그녀가 기르던 반려견 역시 나에겐 작은 위로였다. 강아지가 이렇게 사람을 이해하고 기쁘게 하는 소중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여행을 가서도 티를 내진 않지만 지나가는 커플이나 가족들을 보며 부러움이 있었다. 눈앞의 아름다운 연주와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경치를 동시간에 함께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그만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조금 더 진득한 연애를 하고, 소중한 사람과 여행을 가보며 함께하면 즐거움이 배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맛있는 커피를 그 자리에서 함께 마시고 감탄하고, 내가 가보지 않은 곳을 가보며 새로움에 대한 감탄을 해보는 것. '함께' 하여 울타리를 만들어간다면 그 울타리에는 단단한 뿌리와 안정이 있지 않겠냐고 생각을 해본다.
남들은 이미 다 알고 결혼까지 한 단순한 진리를 나는 왜 인제야 깨달은걸? 자신에게 솔직히 묻자면 관계를 깊게 만들수록 가지게 되는 책임의 무게가 부담이었다. 홀로 살면 누군가에게 맞출 필요도 없고, 여행을 가도 내 멋대로 다닐 수 있으니 편하게 어딨나 싶었다. 한편으론 관계를 맺으며 내 쪽에서 무작정 가지는 기대감과 그에 따라 받게 되는 상처. 그런 것들이 두려웠나 싶다.
서른 중반이 된 지금은 홀로도 좋지만 누군가 "함께" 해보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카페도 운영해 보고, 7년간 글로벌 스포츠 회사에서도 한국 대표로 일해보며 느낀 것이지만 결국 캐파가 커지는 모든 일엔 사람이 8할이다. 팀으로써 하나가 되어 공동의 뜻을 이루려 할 때 비로소 개인의 능력은 배가 된다.
여전히 난 나 홀로 글을 쓰고, 운동을 하고, 사색을 하길 좋아한다. 그러나 이따금 주말엔 친구를 만나거나 여자 친구와 데이트도 한다. 나이가 들어서 물러진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홀로서기를 못 하고 누군가에게 기대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난 이런 변화가 좋다. 세상은 결국 홀로 살 수 없고, 함께 고민을 나누고 힘을 합친다는 건 참으로 멋진 일이다.
MBTI를 그리 신뢰하지 않지만 나는 ENFJ로 정의로운 사회운동가로 정의 된다. 엔프제는 관심사가 다양하고 세상에 도움이 되려고 노력하는 타입이다. 실제로 나 역시 항상 주변에 작게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 중이다. 이제 외톨이에서 함께하는 사람으로 변화하게 된다면, 앞으로 이 기질을 더욱 요긴하게 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